영화 장화,홍련 줄거리 및 결말포함 / 임수정 문근영 염정아 김갑수
- 영화,드라마
- 2020. 7. 7. 16:02
영화 장화,홍련 (2003)
(결말이포함되어있습니다.)
장화, 홍련
A Tale Of Two Sisters, 2003
개요:공포,스릴러(한국)
버닝타임:118분
개봉:2003.06.13
등급:[국내]12세관람가
감독:김지운
관람객 10.0
네티즌 8.74
⊙영화 장화, 홍련 출연배우⊙
⊙영화 장화, 홍련 줄거리⊙
"우리 집에 놀러오세요" | "가족 괴담"
인적이 드문 시골, 이름 모를 들꽃들이 소담하게 피어 있는 신작로 끝에 일본식 목재 가옥이 홀로 서 있다. 낮이면 피아노 소리가 들려 올 듯 아름다운 그 집은 그러나,어둠이 내리면 귀기 서린 음산함을 뿜기 시작한다.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 서려 있는 이 집에서 어른도 아이도 아닌 아름다운 두자매. 수미.수연이, 아름답지만 신경이 예민한 새엄마와 함께 살게 된 그날. 그 가족의 괴담이 시작된다.
수연.수미 자매가 서울에서 오랜 요양을 마치고 돌아 오던 날. 새엄마 은주는 눈에 띄게 아이들을 반기지만, 자매는 그녀를 꺼리는 기색이 역력하다. 함께 살게 된 첫날부터 집안에는 이상한 기운이 감돌고 가족들은 환영을 보거나 악몽에 시달린다. 수미는 죽은 엄마를 대신해 아버지 무현과 동생 수연을 손수 챙기려 들고, 생모를 똑 닮은 수연은 늘 겁에 질려 있다. 신경이 예민한 은주는 그런 두 자매와 번번히 다투게 되고, 아버지 무현은 그들의 불화를 그저 관망만 한다. 은주는 정서불안 증세를 보이며 집안을 공포 분위기로 몰아가고, 동생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수미가 이에 맞서는 가운데, 집안 곳곳에서 괴이한 일들이 잇달아 벌어지기 시작하는 데.
⊙영화 장화, 홍련 리뷰⊙
첫 번째 리뷰
영화 [장화, 홍련]에서 대부분의 평자들이 은근슬쩍 넘어간 문제가 있다. 그것은 실제 귀신의 존재 여부이다. 적지 않은 평론이나 비평이 영화 제목에 사로잡혀 고전소설과의 연결점을 찾는데, 그것이야말로 감독의 귀신놀이에 홀려 진실을 못 보는 독법이다. 귀신의 객관적 존재 여부는 이 영화를 제대로 해석하는 가장 핵심적인 질문이다.
영화를 재밌게 보기 위해서 독자는 최대한 능동적인 존재가 되어야 한다, 고 생각한다. 비록 영화라는 완성품은 감독의 손에서 떠났지만, 그것의 의미와 가치를 만드는 최종 작업은 감상자의 손에 달려 있다. 그래서 독자가 최대한 영화를 완전무결하게 독해할수록 영화는 더욱 좋은 작품으로 거듭난다. 감독의 역량과 무관하게 말이다. [장화, 홍련] 또한 감독의 의도가 어찌 되었든 최대한 완전무결하게 작품을 읽는 것이 작품 자체에 대한 존중일 것이다.
영화에는 2가지 반전이 있는데, 하나는 동생 수연이 이미 죽은 인물이고 따라서 영화 속 수연은 언니 수미의 환상이라는 점. 나머지 하나는 새엄마 은주 또한 수미의 심리 속 역할놀이였다는 점이다. 영화의 핵심은 수미가 끔찍한 사건을 겪은 후 해리성 장애에 걸려, 혼자서 1인3역의(정확히는 1인2역이지만) 장화홍련전을 자신의 머릿속에서 롤플레잉을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진실이 밝혀진 후에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지점이 3군데 있다. 첫째는 동생 수연이 본 귀신의 정체. 둘째는 새외숙모 미희가 본 싱크대 밑 여자아이의 정체. 셋째는 마지막에 새엄마 은주가 옷장 속에서 본 귀신의 정체이다.
수미의 정신병적 롤플레이는 영화 해석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수미의 병에 대해서는 감독이 영화 마지막 20분 동안 지나치게 친절하게 설명한다. 그럼에도 끝내 영화가 함구하는 지점, 수미의 정신병으로도 선뜻 이해되지 않는 장면들. 그것은 바로 그 집에 실제로 귀신이 있나 하는 점이며 그 부분이 명확히 설명되어야 비로소 영화에 대한 독법이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우선 실제로 귀신이 있다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발작 도중 미희가 본 귀신은 수연일 것이고, 마지막에 은주가 본 귀신은 수미(와 수연)의 친엄마일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설명되지 않는 것은 영화 초반에 동생 수연이 본 귀신이다. 왜냐하면 이때는 이미 실제 수연이 죽은 이후의 시점으로, 수연은 수미의 환상이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이기 때문이다. 수미의 환상 속 수연이 실제로 귀신을 본다는 것은 영 껄끄러운 해석이다. 따라서 이 장면만큼은 실제 귀신이 아닌 수미의 의식이 2차적으로 만들어낸(1차적으로는 수연을 가공했으니) 간접적 환상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몇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우선 수미가 자신의 심층에 만들어낸 가상의 수연이 다시 귀신을 본다는 것은, 수미가 생각했을 때 수연이 엄마의 죽음에 원한과 슬픔이 클 것이라는 판단의 결과물일 수 있다는 해석이다. 또는 수미 자신이 가진 엄마의 죽음에 대한 슬픔과 죄책감을 수연을 통해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가장 자연스러운 해석은 아마, 그 대상은 귀신이 아니라 가상의 은주라고 해석하는 것일 터이다. 왜냐하면 수미는 은주를, 수연을 괴롭히는 존재라고 생각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시각적인 측면에서도, 영화에서 수연의 방문을 거머쥔 손은 은주의 손을 가장 닮았다.
하지만 나는 위와 같은 귀신의 존재를 가정하는 해석이 좋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가장 큰 문제는, 귀신이 존재한다면 왜 그들은 수미와 은주의 눈에만 보이는가 하는 점이다. 만약 장화홍련전처럼 원한에 가득 찬 귀신(친엄마와 수연 모두)이라면, 가장 먼저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존재는 남편/아빠인 무현일 것이다. 하지만 무현은 귀신을 보기는커녕 짐작조차 하지 못한다. 그리고 은주의 동생인 선규 부부 중 유독 부인인 미희만 귀신을 봤다는 것도 만족스럽지 못하다. 오히려 미희보다, 은주의 동생인 선규가 귀신을 보고 기겁하는 것이 원귀들의 바람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해석이 맞다면, 이 영화는 장화홍련전의 시대착오적인 동어반복으로 전락하고 만다. 장화홍련전은 그 시대의 눈으로 보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원귀소설이겠지만, 현재의 눈으로 보면 가부장적인 사회 체제를 그대로 답습하는 작품에 불과하다. 장화홍련전에서 장화와 홍련이 자살하는 이유는 처녀성을 잃었다는 모함 때문이다. 진실은,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인정하지 않는 가부장제가 살인범이다. 그 속에서 장화와 홍련 그리고 새엄마는 모두 피해자이다. 새엄마는 자신도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부인하며, 그것을 빌미로 의붓자식들을 죽게 만드는 가련한 캐릭터이다. 만약 현재 시점에서 동일한 사건이 발생해 죽은 아이들의 귀신이 나타난다면, 새엄마뿐만 아니라 친아빠에게도 강력한 원망을 품을 것이다. 특히 [장화, 홍련]에서 무현은 사실상 모든 사건의 근본 원인이라는 점에서 죄를 피해갈 수 없다.
또한 수미의 정신병이라는 주관적 요인 외에 귀신이라는 객관적 요인이 덧대어져야 한다는 점에서 영화가 불완전해진다. 두 개의 개념틀로 해석하는 것보다 하나로 해석하는 것이 더 좋은 독법일 것이다. 영화 러닝타임의 대부분을 수미의 정신병을 보여주고 설명하는 데 할애해놓고, 마지막에 실제 귀신을 본 은주가 복수를 당한다는 스토리는 일관성이 부족하고 감상의 재미도 떨어진다.
따라서 집에 귀신이 없다고 가정하는 것이 더 낫다. 그렇다면 처음에 수연이 본 귀신은 귀신이 아니라, 수미의 심리 속에서 수연을 괴롭힐 거라는 은주의 이미지일 것이다. 미희가 본 싱크대 밑 귀신은 미희의 공포와 죄책감의 반영일 것이다. 친엄마와 수연이 죽은 날 선규 부부는 그 집에 있었기 때문이다. 은주가 본 장롱 속 귀신 또한 은주의 두려움과 죄의식이 만든 이미지일 것이다(이후에 은주 또한 수미처럼 정신병에 걸려 병원 신세를 지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렇게 읽으면 [장화, 홍련]은 죄의식과 관련한 영화가 된다. 친엄마와 수연의 죽음이라는 사건에 죄의식을 느끼는 자들(수미 은주 미희)은 모두 귀신을 보고,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는(않는) 자들(무현 선규)은 귀신을 감지하지 못한다(않는다). 하지만 이것이 영화 해석의 끝이라면, 몇몇 평자들의 말마따나, 하나의 일관된 주제를 담은 작품이 아니라 정신병 또는 정신분석의 한 사례에 그치고 말 것이다. 혹은, 무리하게 결론을 이끌어낸다면, 죄는 짓더라도 죄의식은 짓지 말라, 정도가 되고 만다.
나는 이 지점에서 더 나아가야 작품의 제대로 된 의미를 이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관객들은 영화를 보고 수미를 정신병자로 규정할 것이지만, 내가 보기에 오히려 수미의 심리는 지극히 정상이다. 자신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사건을 겪은 후 그것으로부터 자신의 정신을 방어하기 위해 수미는 해리성 인격 장애에 걸린다. 그것은 수미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어기제이며, 반대로 말하면 그런 방어기제를 나타내는 것은 정상적인 행위이고, 오히려 수미의 정신이 건강하다는 방증이다. 하지만, 아내와 딸을 죽음으로 몰고, 남은 딸마저 정신병에 걸리게 만든 무현이 멀쩡하다는 점이야말로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다. 끔찍한 사건에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고 태연하게 살아가는 무현이야말로 정신이 망가진 소시오패스가 아닐까.
이 지점에서 [장화, 홍련]은 죄의식에 대한 영화에서 개인의 내면화에 관한 영화로 확장한다. 엘렉트라 콤플렉스 자체가 실제로 존재하는 현상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개인적으로 수미의 엘렉트라 콤플렉스라는 개념으로 영화를 보는 것은 올바른 독법이라고 생각한다.) (추가로 엘렉트라 콤플렉스가 프로이트의 가부장적 관념의 산물이라는 비판은 여기서 중요치 않다). 그것이 엘렉트라 콤플렉스든 무엇이든, 한 개인의 욕망이 존재하고, 그것을 억압하는 사회가 존재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수미는, 자신의 욕망을 사회가 결코 용납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고 그것을 남들은 전혀 인지하지 않음에도 스스로 그 욕망을 자기 검열 한다.
은주와 미희가 귀신을 본 것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사회의 객관적인 질책 때문이 아니라, 타인으로부터 자신에게 향할 것으로 짐작되는 마음 속 감시자의 시선을 내면화하였기 때문에 귀신을 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한 번 감수성의 영역으로 논의의 외연을 확장한다. 감독은 아마도 감수성을 여성의 영역으로 본 듯하다. 그래서 감수성을 가진 여성들은 외부의 시선을 쉽사리 내면화하여 귀신을 보지만, 감수성이 없는 남성들은 그러지 못한다. 수미의 해리성 장애 또한 타인의 관점을 내면화한다는 점에서 감수성의 과잉이 빚어낸 증상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일차적으로 개인의 욕망을 억압하고 그것을 내면화시키는 사회 체제와 구조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더 나아가 그 내면화로 인한 병증을 인정하지 않고 배제시키는 것이야말로 더 큰 문제이다. 우리 사회는 일관된 정체성을 정상성의 영역으로 둔다. 반대로 다중인격이나 기억상실증 등의 일관적이지 않은 정체성을 비정상성의 범위에 위치시킨다. 하지만 관점을 바꿔 보면, 일관된 정체성이란 타인의 시선을 나의 심리에 들여놓지 않겠다는 완고함의 반영일 수도 있다. 반면 다중인격은 외부의 입장을 받아들이는 유연함으로 읽을 여지가 생긴다. 여전히 이성적 질서를 우위에 두고, 감성적 혼란을 열등한 것으로 치부하여 외부로 밀어내는 우리 사회가 여전히 관용이 부족하다는 것이 영화로부터 얻을 수 있는 메시지일 것이다. 생각해 보면 이보다 끔찍한 사회는 없다. 죄를 짓고도 일말의 죄의식 없이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세상 모든 무현들의 사회와, 피해자임에도 죄의식을 사회적으로 승인 받지 못해 정신병원에 쳐박히게 된 세상 모든 수미들의 병원. 그 두 공간이 소통하지 못하는 한, 사회는 더 어두워질지 모른다. 마치 영화 속 ‘그 집’의 분열처럼. 제목 장화와 홍련 사이에 찍힌 쉼표처럼.
두 번째 리뷰
이 영화 <장화, 홍련>이 공포스러운 이유는 이해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정확히 말해서, 공포스러운데 남성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점이 필자의 공포감을 배가시켰다. 남자 배역이 등장하지만, 영화는 철저히 여자들에 의해 꾸려나가며, 그들의 욕구 반경 안에서 수 많은 비밀한 기호들이 햇살처럼 부서진다. 이렇게 철저하게 남성관객(불만이 본인에 한정되지 않는다면)을 소외시킨 공포영화가 있을까?
기존의 공포영화에서 여성은 주요 인물로 등장하여 등식화된 공포를 선사해왔다. 그들의 역할은 성적인 환타지를 제공하고, 남성을 괴롭히며, 결국, 종교라는 공권력에 의해 파멸당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장화, 홍련>에서 여성 인물은 성적인 환타지를 제공하지도, 남성을 괴롭히지도, 종교라는 믿음직스러운 공권력에 의해 파멸당하지도 않는다. 이런 발칙한 영화가 또 있을까? 현란하게 다듬어진 빛과 소리에 의해 객석에서는 비명이 곡예를 펼치지만, 영화가 끝난 후 여자친구와 동행한 남성이 있다면 슬그머니 애인의 손을 놓고 화장실에 들어가 투덜거렸을 것이다. 도대체 무슨 내용이야? 라고 말이다.
영화는 전래동화로부터 모티프를 차용하고 있지만, 그것과는 다른 교통편으로 공포를 향해 달리고 있다. 전래동화는 계모가 악인으로 등장하여 자매를 괴롭히지만, 크게 놓고 보면 무책임한 남성 중심 사회에 의해 희생 당하는 여성의 설움을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동화에서 비극의 요인을 제공한 사람은 아버지이며, 이야기 구조는 그 부당함을 (남성, 혹은 남성 중심 사회에)호소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런 이야기는 여성들의 결속과 유대를 암묵적으로 강화시킨다.
그러나, 감독은 아버지라는 케릭터를 역할이 모호할 정도로 축소시켜버림으로써 구화의 대상이 남성 중심 사회라는 전래동화의 전근대성으로부터 이야기를 구출해내었다. 아울러, 이야기의 시발이 계모의 악행이 아니라 장화에 해당하는 수미의 죄의식에서 발아한 착란과 환상이라고(혹은, 일지도 모른다고) 새롭게 설정을 가함으로써 공포의 구조에 현대성을 부여하였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장화 홍련 전"으로 상징되는 전래 공포 구조에 대한 감독의 현대적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감독이 공포의 구조를 새롭게 해석하고 있다지만, 이 영화는 어떤 구조에 대한 영화가 아니다. 감독이 여러 인터뷰에서 밝혔듯이 이 영화 <장화, 홍련>은 감독으로서는 공포의 호흡에 대한 작가적 사유이며, 관객으로서는 공포 이미지에 대한 공포스러운 서핑인 것이다. 감독은 이런 이유로 서사와 이성, 논리의 잣대로 영화를 재단하려는 남성관객보다 감성적, 지엽적, 세부적, 주변적인 시선으로 풍요롭게 영화를 감상하는 여성관객들에게 지지를 보낸다고 말한다.
결과적으로 <장화, 홍련>은 남성적 사유가 지배한 공포물의 맥락을 탈피하여 근원적으로 자유로운, 때문에 보다 여성적인 공포를 지향하는 주목할만한 몸짓이라고 할 수 있다. 공포를 죄의식의 견지에서 형상화함으로써 기존 공포영화의 틀에 얽매여 있던 관객들에게 열린 감각을 요구하고 있다.
여기까지 감독의 의중을 헤아리게 되면서 이 영화가 소재와 설정의 특수성으로 인해 여성적인 기호와 코드를 탐닉하였을 뿐, 결코 남성을 소외시키거나 여성관객에 편향된 작품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장화, 홍련>이 여성을 위한 공포 요리 특선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남성관객과 차별화된 여성관객의 영화감상 태도에 대한 김지운 감독의 언급에서 오히려, 그가 이 영화를 만들기위해 여성의 심리와 세계를 깊히 탐구하여 그 이해를 바탕으로 영화의 성격을 여성에게 채널화하였다는 정보를 얻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이 영화의 공포는 여성에 대한 이해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전혀 의도되지 않은, 남성관객만의 색다른 공포가 시작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낯선 기호들, 생경한 코드의 배열이 주는 공포, 이해할 수 없기에 절대공포를 맛볼 수 없다는 공포가 남성관객들이 받는 색다른 공포감일 것이다.
영화 장화, 홍련 결말
새엄마 은주(염정아)는 수미(임수정)의 또 다른 인격이었습니다. 수연(문근영)은 이미 죽었고 수미(임수정)랑 함께 지낸 수연(문근영)은 수미(임수정)가 만들어낸 환상이었고,
수연(문근영)이 세상을 떠나기 전 의사 무현(김갑수)은 간호사 은주(염정아)와 불륜을 저질렀습니다. 그로 인해서 자매의 친엄마는 옷장에 목을 매달아 자살을 했고 엄마의 시신을 발견한 수연이 놀라서 엄마의 시신을 꺼내려다 옷장까지 쓰러뜨려 그 밑에 깔리게 됩니다.
옷장이 쓰러지는 소리에 은주가 올라와 이 광경을 목격하고 못 본 척 밖으로 나오다가 구해주러 다시 들어가는 순간 그 소리를 듣고 방에서 나온 수미와 마주치고 두 사람은 말다툼을 하게 됩니다. 은주는 수미에게 이 순간을 후회하게 될지 모른다. 명심하라는 말을 하는데 자신에게 무례하게 굴면 수연이 압사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결국 수미는 수연을 두고 돌아서게 됩니다.
수연이 간절하게 언니를 부리는 장면, 돌아선 채 걸어나가는 수미의 모습. 돌이킬 수 없는 걸음이 흘러나오며 영화는 끝이납니다.
⊙영화 장화, 홍련 네티즌 평점⊙
영화 장화, 홍련에서 마지막 '돌이킬 수 없는 걸음'이 나올 때 휘몰아치는 여운은 정말 최고였다
영화 장화, 홍련은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한참동안 여운을 주는 완성도 높은작품이다. 배경음악과 세련된 영상과의 조화가 인상깊다. 또한 내용면에서도 다른 공포영화와는 구별되는데?이 영화는 약간 절제된 듯 공포감을 느끼게 했다. 국내 공포영화 중 단연 최고이지 않을까.
영화 장화, 홍련은 1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내 평생 최고의 한국 공포 영화로 남아있음. 영상, 스토리, 배우들의 연기, 음악. 무엇 하나 허술한게 없음.
영화 장화, 홍련은 동생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스스로를 아프게 할 수밖에 없었던 수연이를 보자니 너무 가슴이 쓰렸다. 정말 슬프고 아름다웠던 영화. 엔딩에 '돌이킬 수 없는 걸음'이 나올 땐 여운이 휘몰아쳤다.
영화 장화, 홍련은 한국산 공포 스릴러 수작 중 몇 안되는 작품. 특히나 영상과 효과음이 긴장감을 배가시키고, 돌이 킬 수 없는 걸음이라는 배경음악은 영화가 끝나고도 계속 귓가에 맴돈다.
영화 장화, 홍련은 하나 둘씩 이해하면 할수록 더없이 슬퍼지는 영화. 영화속 적막함, 어두움, 원귀, 공포등이 결국 결말엔 모두 슬픔의 파도로 밀려왔다
영화 장화, 홍련을 보면서 무언가에 홀린듯한 느낌을 받았다. 영화의 배경이나 장소 그리고 연출하는 장면까지 한국공포영화에 한획을 그은거 같다. 특히 싱크대 귀신은 심장이 멎는다. 그 장면 본 이후로 몇일간 침대 구석의 빈 공간이나 싱크대 바닥은 얼씬도 못했다.
영화 장화, 홍련에서 ''너 지금 이순간 후회하게 될지도 몰라. 명심해' 라는 염정아의 말 뒤에 임수정이 문근영이 죽어가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그냥 나가버리자 '돌이킬 수 없는 걸음' 이 나오는데 단연 이 영화가 한국 공포영화의 수작이라는 것을 느꼈다.
영화 장화, 홍련은 꽤 집중도가 높은 영화다. 상당히 괴기하면서도 나까지 정신이 나간게 아닐까라고 착각할 정도로 혼란스러웠던 영화.
영화 장화, 홍련은 스토리가 탄탄했을 뿐더러 귀신이 나올 때의 소리와 방법 모두 개봉한 지 10년이 넘은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신선하다. 최근 봤던 공포영화 중에 단연 최고인 것 같다. 앞으로도 이런 영화가 나왔으면 좋겠다.
영화 장화, 홍련은 시나리오도 연출도 연기도 미술도 음악도 모두 다 완벽했던 영화. 무려 16년전 영화임에도 전혀 촌스럽지 않고 볼 때마다 빠져보게 되는 영화.
영화 장화, 홍련은 한국에서,그것도 17년전 작품이라고는 믿기지 않을정도로 심지어 흥행하기 쉽지 않은 공포영화라는 장르인데도 반전스릴공포와 깊은 여운을 같이 남기는 한국영화에 몇없는 명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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